
본관은 현풍이며 1859년 2월 26일 황해도 장연에서 출생. 김순영의 부인이며 독립운동가의 어머니이다. <천자문>을 가르치고 <동몽선습> <사서삼경> 등을 읽히는 등 아들 김구의 교육에 헌신적으로 노력하였다. 17세 때 남편이 반신불수가 되자, 안악 신천, 장연, 해주 등지로 의사를 찾아 안정을 되찾게 하였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으로 충격을 받고 봉기한 김구가 치하포에서 일본군 중위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어 인천형무소 등지로 전전할때, 매일같이 면회가서 아들을 격려하였다. 김구가 탈옥하자 남편과 같이 체포되어 인천형무소에 3개월간 투옥되었던 일도 있다.
곽낙원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한글 몇 자와 숫자만 겨우 읽을 정도로 많이 배우지 못했다. 그럼에도 대한민국 임시 정부 내에서 존경 받은 큰 인물이었으며, 임시 정부의 지도자인 김구 선생을 훌륭하게 키웠다. 곽낙원의 인품을 엿볼 수 있는 몇 가지 이야기가 있다.
곽낙원의 생일이 다가오자 여러 독립운동가들이 축하해 주기 위해 조금씩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다들 너무 가진 것이 없었기 때문에 돈을 모으는 데도 여러 날이 걸렸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곽낙원은 자신의 생일상 차릴 돈을 직접 달라고 했다. 그 돈으로 먹고 싶은 음식을 만들어 먹겠다고 했다.
생일날이 되자 곽낙원은 임시 정부 국무위원들과 청년들을 자신의 셋방으로 초대했다. 손님들이 다 모이자 곽낙원은 식탁 위에 보자기를 하나 꺼내 놓았다. 보자기 안에는 맛있는 음식은 없고, 권총 두 자루만 있었다. 그 돈으로 권총을 산 것이다.
"독립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이 생일은 무슨 놈의 생일인가? 그런 데 쓸 돈이 있으면 나라를 찾는 일에 쓰도록 하게. 이 총으로 왜놈들을 한 놈이라도 더 죽인다면 내 속이 편안하겠네." 하고 말했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나석주 선생이 전당포에 자신의 옷을 저당잡혀 빌린 돈으로 백범 김구 선생의 생일에 고기와 찬거리를 사 왔다. 그 일을 들은 곽낙원은 그날 밤 쉰 살이 넘은 김구 선생의 종아리를 회초리로 때렸다고 한다.
"사소한 일을 동지들에게 알려 생일을 차려 먹다니, 그러고도 어찌 독립을 하겠느냐?"
힘든 시절, 작은 일에서 마음이 풀어지면 큰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신 곽낙원의 의지가 꿋꿋하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국권이 피탈되고, 또한 남편의 죽음으로 집안형편이 어렵게 되자 삯바느질과 남의 집 가정부 노릇을 하며 김구를 키웠다. 1922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아들을 따라 옮겼다가 1926년 귀국하였다.
82세로 충칭에서 생을 마쳤다. 1992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 김구 (1876~1949)
인천 감옥소에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바로 백범 김구 선생을 살린 고종황제의 전화였다. 김구 선생은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고자 일본 군인을 죽인 죄로 사형에 처해졌는데, 이를 안 고종황제가 전화를 걸어 사형을 중지시켰다. 전화가 개통된 지 3일째 되는 날이었다. 김구 선생은 이후 임시 정부를 이끌며 독립운동을 펼쳤다. 그리고 [백범일지]를 썼다.
[나는 여성독립운동가입니다]
[두산백과 참조]
여성이지만 대장부의 마음을 가지신 옛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숙연해 집니다.
그리고 위대한 인물 뒤에는 위대한 어머니가 계셨다는 것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