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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귀 타고 전국을 순회한 한국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 (1877~1910)
박에스더의 본명은 김점동이다. 에스더는 세례명이고 남편 박유산의 성을 따랐다. 당시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신여성 사이에서는 상대적으로 평등한 서구 여성의 지위를 동경해서 남편의 성을 따서 이름을 짓는 것이 한동안 유행이었기 때문이다.
어린시절 점동은 이화학당에 자주 놀러갔다. 아버지가 정동 예배당을 세운 에펜젤러 목사님을 도와주고 계셨기 때문이다. 학교 담벼락에 붙어서 보면 머리가 노랗고 눈이 파란 신기한 사람들도 있고, 공부하는 또래 여자애들도 보였다. 하지만 할머니랑 엄마는 선교사들이 애들을 잡아가서 한입에 꿀꺽한다며 못가게 하였다. 조금 무섭기도 했지만 애들이 부르는 이상한 노래를 부르고 싶어 아빠를 졸랐다. "아들도 없는데, 딸이라도 공부를 시켜볼까나?" 할머니와 엄마의 반대가 있었지만 이화학당에서 학교에만 보내 준다면 먹이고, 입히고, 가르쳐 준다고 하여 마침내 입학한다.
이화학당에 들어간 점동은 빠르게 영어를 익혔고 다음 해 18명이나 학생들이 되었는데도 가장 영어를 잘해서 에스더라는 새로운 이름도 받게 되었다. 그러다 닥터 홀 부부가 와서 여자들이 진찰 받을 수 있는 병원인 '보구여관'을 세웠고 통역을 맡은 에스더는 홀 선생님의 진료를 거들어 주게 되었다. 윗입술이 세로로 찢어진 아이의 입술을 붙이는 수술 장면을 보았고 거짓말 같이 아이 입술이 말짱해진 것을 본 아이 엄마는 기적이라고 울었고 그때 의사가 되리라 결심한다. 홀 부인은 장학금을 받고 미국에서 의사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었지만 집안에서는 멀리 타국에 여자애 혼자 보낼 수 없다고 반대했다. 그때 예배당에 다니는 박유산 씨와 혼인을 하고 뜻에 따라,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뉴욕 퍼블릭 스쿨에서 1년, 간호학교도 6개월간 다니다가 드디어 그토록 소망하던 발티모어 여자의과대학(현 존스홉킨스대학)에 입학한다. 학비는 장학금으로 내었지만 생활비는 부부가 벌어야만 했다 생활이 너무 힘들었지만,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공부할 수 없으리라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어떻게든 꼭 해내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 그러자 남편이 아내가 훨씬 의지가 강하고 머리가 좋으니 두 사람 중 한 명만 공부할 수 있다면 아내가 하는 게 낫다고 식당을 다니면서 생활비를 벌어다 주었다. 그런데 마지막 졸업 시험을 치르는 동안 남편이 병을 얻어 폐결핵으로 사망한다.
박에스더는 남편에게 얼마나 큰 빚을 졌는지 절감하고 사회에 돌려주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1900년 정식으로 의사가 되어 조국으로 돌아와 보니, 나라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 같았다. 일제에 맞서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사람들을 치료하는 일이었다. 박에스더는 여성전용병원인 보구여관(동대문부인병원의 전신)에서 진료를 했다. 연간 수천 명의 환자를 휴일도 없이 돌보고 평안도, 황해도 지역으로 가마를 타거나 당나귀를 타고 진료하러 다녔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시골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3,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무료로 진료했다. 진료뿐 아니라 영어교재를 한글로 번역하고 성경과 위생교육도 해가며 과중한 업무를 해나갔다. 사람들은 수술하는 모습을 보고는 귀신이 재주를 부린다고 놀라워 했다. 그녀는 무엇보다 교육이 중요하다고 외쳤다.
박에스더는 또한 닥터 홀 부인을 도와 맹아 학교와 간호 학교를 세우는데도 힘을 쏟았다. 하지만 너무 쉬지 않고 일을 한 탓에 환자를 돌보는 사이 몸이 병들어 가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결국 30대의 이른 나이에 영양실조와 폐결핵으로
사망하고 만다.
[나는 여성독립운동가입니다]
[두산백과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