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12월 11일 경기도에서 출생했다. 부친은 중인 출신의 박원순이며 모친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박자혜는 어린 시절 아기나인으로 궁궐로 들어갔다. 중인 출신인 부친이 딸을 궁궐로 보낸 것은 가정 경제가 넉넉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라 추측된다. 1900년대 당시 궁궐 밖에서는 여성들이 근대교육을 받으며 전통에서 벗어나고 있었지만, 10년 간을 궁궐에서 보낸 자혜는 여전히 궁녀의 신분에 적합한 유교적인 여성관을 교육받았다.
창경궁 돌담길을 따라 걷고 있을때였다. "캭캭캭캭 ~" 원숭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병원으로 가던 박자혜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며 높은 궁궐 담장을 올려다보았다. 앙상한 벚나무 가지 끝에 새 한 마리가 뽀르르 날아와 앉아 있었다.
아기나인으로 궁에 들어가 생활했던 십여 년의 세월이 주마등같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는 저런 동물원도, 저런 벚나무도 없었지.'
곧 꽃망울을 터뜨리면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창경궁 벚꽃을 보려고 몰려들까? 아니 저 이상하게 생긴 원숭이나 코끼리를 보려고 오는 건지도.
왜 하필 창경궁 안에 동물원을 만들었을까? 일본 천황의 궁궐에도 동물원이 있는 걸까?
자혜는 신기한 동물들을 구경하기 위해 궁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임금님이 살아계셨더라면 . 아니야, 차라리 이런 꼴을 보느니 고종황제께서는 어쩌면 돌아가시는게 나았을까? 정말 사람들이 쑥덕대는 것처럼 독살당하신 걸까? 일본에 볼모로 잡혀가신 태자마마는 어찌 되실까? 이젠 정말 조선이 일본이 된 걸까?
그래도 자혜는 운이 좋았다. 더 이상 궁녀가 아니니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에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갈팡질팡하던 자혜에게 조하서 상궁마마는 새로운 길을 알려 주었다.
"자혜야, 내가 널 숙명여학교에 다닐 수 있게 해 줄 수 있단다. 어떠냐? 열심히 공부해 보겠니?"
"네 마마님, 열심히 공부할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나라가 이 꼴이 되었지만, 곧 태자마마도 일본에서 돌아오실 것이다. 왕실이 다시 복원되면 그때에는 네가 큰 힘이 되어 주어야 한다."
"예.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서둘러 창경궁 맞은편 조선 총독부 소속 병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혜가 근무하는 산부인과로 들어서자 싸한 소독약 냄새가 풍겨 왔다. 자혜는 숙명여학교를 졸업한 뒤 조산부 양성소에 들어가 산파, 즉 간호사 일을 배웠다. 간호사는 여자가 경제적으로 독립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직업이었다. 그러나 총독부 소속 병원에서 일한다는 게 묘하게 씁쓸했다. 특히나 일본인 의사과 간호사들에게 괄시를 받을 땐 저도 모르게 주눅이 들곤 했다.
1919년 3월 1일,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 자주 독립을 외치는 시위가 있었다고 한다. 파고다 공원뿐 아니라 전국에서 동시에 만세 시위를 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거리로 몰려나오자 일본 경찰들은 곤봉으로 두들겨 패고 주동자들은 경찰서로 끌고 갔다고 한다.
"선생님, 여기 총상 환자에요. 급히 수술을 해야겠는데요."
자혜는 총상을 입은 환자를 발견하고 외쳤다. 설마, 시위대에게 총격까지? 그럴 리가?
환자를 수술실로 옮기다가 품 안에 든 종이를 발견했다.자혜는 얼른 그 종이를 품 속 깊이 감추었다. 가슴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슬프다! 오래전부터의 억울함을 떨쳐 펴려면, 눈앞의 고통을 헤쳐 벗어나려면, 장래의 위험을 없애려면, 눌러 오그라들고 사그라져 잦아진 민족의 장대한 마음과 국가의 체모와 도리를 떨치고 뻗치려면, 각자의 인격을 정당하게 발전시키려면, 가엾은 아들, 딸들에게 부끄러운 현실을 물려주지 아니하려면······우리는 나아가 취하며 어느 강자를 꺾지 못하며, 물러가서 일을 꾀함에 무슨 뜻인들 펴지 못하랴? 독립 선언서를 읽으면 읽을수록 자혜는 가슴이 요동쳤다.
박자혜는 3·1 운동 이후 간호사들과 조산원들의 모임인 '간우회'를 만든다. 간우회를 통해 유인물을 나누어 주고 독립 만세 운동을 했다. 또 조선인 의사들과 힘을 합해 진료를 하지 않으며 일제에 저항했다. 이 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련은 박자혜로 하여금 독립 의지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 줄 뿐이었다 더 이상 일본인들을위한 병원에서는 일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으나, 병원에서는 쉽사리 자혜를 놓아주지 않았다.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거짓말로 2주간의 휴가를 얻은 자혜는 곧장 중국으로 건너갔다.
북경에서 대학 공부를 하던 자혜는 신채호를 만나 결혼한다. 신채호역시 3·1 운동을 계기로 국내를 떠나 블라디보스토크, 상해, 북경 등지에서 독립 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 박자혜는 신채호와 각지를 다니면서 애국지사들의 독립운동을 도와준다. 그러던 중 신채호가 다렌 감옥에 갇히자 국내로 들어와 중국에 있는 독립운동가들과 국내 인사들의 연락을 이어주는 일을 하였다 . 나석주 독립지사가 조선을 경제적으로 침략하고 있는 동양척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질때 도와준 사람도 바로 박자혜였다.
또한 박자혜는 남편 신채호가 감옥에서도 계속 역사 연구를 할 수 있도록 필요한 책들을 구입하여 보내 주었다. 감옥에서 세상을 떠나기 전 7년여 동안 옥중에서 집필한 신채호의 저서들은 박자혜의 도움 없이는 어려웠을 것이다.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워서 두꺼운 솜옷을 입고 싶다는 신채호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했을 때 박자혜는 이렇게 말했다. "다렌의 감옥은 얼마나 춥겠습니까? 서울이 이러한데요." 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하니 경제적인 이유로 감옥에 있는 남편에게 솜옷하나 해 줄 수 없었던 그 안타까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남편 신채호는 1936년 2월 21일 오후 4시에 운명을 달리하고 첫째 아들 수범은 학교를 졸업하고 해외로 떠났으며, 둘째 아들 두범은 그 다음해 1942년 세상을 떠났다. 박자혜는 1943년 홀로 셋방에 살다가 병고로 세상을 떠났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는 박자혜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나는 여성독립운동가입니다]
[두산백과 참조]
대한민국 여성들의 투쟁사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군요 ^^ 박자혜 여사께서 신채호 선생의 아내였다니.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흥미로운 정보입니다 ^^ 클랜 멤버분들 중에 사회복지사, 간호사분들이 많이 계시는데 이분들이 일제시대에 태어났으면 '간우회'에 계셨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