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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8월 3일 수원유수를 지낸 정주영의 2남 4녀 중 셋째딸로 출생하여 김의한과 결혼하였다. 3.1 운동이 일어난 후 시아버지인 김가진과 남편 김의한이 독립운동을 위해 상하이로 망명하자 친정아버지에게 8백원을 얻어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다. 그러나 상해 임시 정부는 너무 가난했다. 무언가 큰일을 하려고 해도 자금이 너무 부족해서 제대로 된 일을 할 수 없었다.
정화는 다시 국내로 가서 자금을 좀 얻어 처음에 친정이나 시댁에 가서 돈을 받아 올 생각이었으나 친정이나 시댁은 일제의 감시가 심할 테니 절대 가면 안된다고 하여 임시 정부의 지시에 따라 자금 조달 업무믈 맡아 달라고 하였다.
자금 조달 업무는 시아버지인 김가진이 국내에서 자금을 내어 줄 만한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면 그 편지를 보여 주고 자금을 받아 오는 거였다. 그는 백반물로 글을 써주었다. 평상시에는 보이지 않지만 불을 쬐면 종이에 글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던 중 정화는 기막힌 일을 경험하게 되었다. 돈 많은 사람들은 오히려 돈을 주지 않고, 가진 게 별로 없는 사람들은 선선히 돈을 건네주었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꼭 써 달라고 하면서, 가진 게 많은 사람들은 가진 것만큼 겁도 많고 도리어 일제에 신고를 하겠다고 협박하는 이들도 있었다. 겁을 먹고는 당장 내집에서 나가라고 소리치는 사람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군자금을 내어 주었고 치마 속에 군자금을 숨겨서 압록강을 여섯 번이나 건넜다. 한밤중에 쪽배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는 건 무섭지 않았지만 일제의 탄압이 무서워 돈을 건네주지 않으려는 겁쟁이들을 바라보는 일은 너무나 힘들었다.
임시 정부 27년의 세월 동안 안살림을 책임졌다. 많은 독립투사들에게 밥도 해 주었다. 또한 그들의 마지막 순간에도 같이 있었다. 정화는 누구의 딸, 누구의 며느리, 누구의 아내가 아니라, 나, 정정화라는 사람으로 당당하게 살아가야 했던 임시 정부 시절이 너무나 좋았다. 여자는 얌전히 집안에만 있어야 하는 국내와 달리 임시 정부에서는 누구든 스스로 알아서 일하고,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를 지켜야 했고, 또한 각자 맡은 일을 확실하게 해야만 했다. 그게 바로 독립운동이었다. 독립된 개개인들이 모여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해 함께 보냈던 젊은 시절이 너무나도 자랑스럽다고 하였다.
임시 정부 시절 김구로부터 한국의 잔다르크 라는 칭송을 받았다. 해방후 귀국하였으며 한국전쟁 당시 남편 김의한은 납북되었다. 1982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수여되었고 1991년 사망하여 대전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진정한 여장부들, 한결같이 독립운동가들은 '나' 보다는 공동체를 생각하고 헌신하는 마음이 크다 . 독립운동가들 중에는 기독교인도 있고 천주교인도 있지만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은 예수님의 희생정신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된다. 혹자는 미국의 전적인 도움으로 우리나라가 독립을 했다고 하지만 이분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이 없었다면 과연 독립 할 수 있었을까? 오늘도 감사하는 마음에 저절로 숙연해진다.
[나는 여성독립운동가입니다]
[두산백과 참조]
하은님❤ 심리전에서 이겨보려구요 ㅎㅎ
미라클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