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실패했습니다”: 덴마크의 신문사는 COVID에 관한 기사들에 대해 사과했다.
Ekstra Bladet은 덴마크의 거대 신문사 중 하나로써, 펜데믹 기간 중 저널리즘에 관한 중요한 교훈 중 하나를 얻었다.
월, 2022년 1월 24일 / Jon Miltimore

덴마크 신문사는 그들의 독자들에게 지난 2년 간의 펜데믹 기간동안 정부의 데이터와 네러티브에 대해 더 많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은 것에 대해 사과하였다.
1904년에 설립된 Ekstra Bladet는 정부의 데이터와 결론을 보도하기 전에 먼저 검증하는데 충분한 실사를 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거의 2년 간, 우리는 – 언론과 국민들 – 공권력의 매일 같은 코로나 관련 자료로 최면에 걸렸다.” Bladet의 저널리스트 Brian Weichardt는 적었다. “계속되는 정신적인 각성은 우리 모두를 엄청나게 지치게 했다. 이것이 – 우리 언론이 – 자신의 노력들로 검토해야만 하는 이유이다. 그리고 우리는 실패했다.”
이 달 초, twitter에서 널리 퍼진 Mea culpa에서 Weichardt는 신문사는 보건 관계자가 데이터를 정리하는 방식에 대해서 더 많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언급했다.
“우리는 정부에게 그 데이터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 대해 질문했을 때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예를 들어, 코로나를 보유하고 입원 한 사람들과 코로나 때문이 아닌 사람들. 이것은 다른 뜻이기 때문이다. 큰 차이가 있다. 공식적인 입원환자 수치는 실제로 병원에 있는 사람들의 수보다 27%가 더 많았다. 이 값은 실제로 코로나를 갖고 있다고 알려진 사람들의 수였다. (즉 입원환자 수가 아니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지금 에서야 알았다.
물론, 가장 우선적으로 정확하고 정직하게 정보를 제공해야 하는 주체는 정부당국이다. 얼마나 많은 수가 실제로 아프거나 코로나로 사망하였는지에 대한 수치는 명백하게 이미 발표되었어야 한다.”

저널리스트는 백신과 덴마크 병원들과 특별히 정부의 수사적이고 네러티브적인 표현들을 피했어야 한다. 특별히 백신과 덴마크 병원들과 관련된 최상급의 표현들을 사용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Weichardt가 언급했다.
“백신들은 일관적으로 우리들의 ‘슈퍼 무기’로 불렸다. 우리의 병원들은 ‘슈퍼 병원’으로 불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대부분의 인구가 ‘슈퍼 무기’를 장착했음에도 우리의 ‘슈퍼 병원’들은 심각하게 부하가 걸리는 것처럼 보였다.”
“아이들마저 대규모로 백신접종을 하고 있다. 우리 이웃 나라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다른 말로 하면, ‘슈퍼’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 상황이란 것이다. 이것이 백신에 대한 것이든, 병원들에 대한 것이든 둘 다에 관해서 든 그렇다. 어떤 경우라도, 정부당국이 국민과 대화할 때 ‘슈퍼’란 용어는 적절하지 않다.
권력에 대한 독립적인 견제
이 사과는 저널리즘의 전통적인 역할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한다. 그것은 바로 권력의 대변자가 아닌, “권력에 대한 독립적인 견제”의 역할이다.
“저널리즘은 대부분의 시민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힘과 지위를 가진 자들에 대한 감시인의 역할을 할 수 있는 특별한 지위를 갖고 있다.” 아메리칸 프레스 인스티튜트(API)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저널리즘은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자들을 위해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기도 한다.”
이런 이유로, 저널리스트들은 “정보에 속임을 당하면 안 된다.” 그리고 “권력에 겁을 먹어서도 안 된다.”고 API는 이야기한다.
펜데믹 기간 동안, 이것은 자주 일어나지 않았다. 이것은 비단 덴마크에서 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미국에서 미디어는 안소니 파우치 박사의 말과 백악관의 최고 의학 전문가의 말을 마치 일종의 복음처럼 보는 경향을 나타냈다. MSNBC의 Nicolle Wallace는 스스로 파우치의 열성 팬이라고 말하는 대신 많은 이들을 위해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NIH의 수장은 셀 수 없이 많은 잡지의 커버를 장식했다. 그의 삶은 디즈니의 바이오픽다큐에서도 볼 수 있다. 지난에 6월까지 400개의 미디어 이벤트에 참여하였다. 그의 역할은 홍보가 아님에도 그랬다.
대부분의 미디어는 파우치에게 질문하거나 비판하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그의 말이 계속 바뀜에도 불구하고. 어떤 저널리스트는 그의 요청에 따라 파우치의 공개적인 메시지에 문제가 되는 네러티브를 지지하는 기사를 내보냈다.
파우치는 그의 펜데믹 전략에 관해 비판적인 자들에게 강력하게 대응했다.
“그들은 실제로 과학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파우지는 지난 11월 말했다. “왜냐하면, 내가 과학을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기술 지원을 요청한다’
어떻게 미디어는 권력에 있는 자들에게 질문을 던지기 보다 그들의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하게 되었을까?
한 가지 설명은 콜롬비아대 저널리즘 교수인 Michael S. Schudson이 작성한 기사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은 리버럴 민주주의 체제 안에서의 저널리즘의 역할에 대한 것이다.
Schudson는 API처럼, 저널리즘의 첫째 임무는 진실(현실을 첫째로 두는 것)을 전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문제는 오늘날 많은 이들이 무엇이 진실인가에 대해 동의하지 않고 있으며, 점점 더 상대적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대학 2년차 학생들은 그들의 첫 철학 수업에서 ‘그것은 상대적이다.’ 그리고 ‘그것은 너의 의견일 뿐이다.’라는 논쟁에 들어서게 된다. – 연구조사 없이, 논쟁 없이, 논의 없이 우리의 기존의 의견들은 바뀌어진다.” “이것이 우리가 2년차 학생(Sophomore)들을 Sophomoric이라고 -건방진/미성숙한/아는 체한다-고 부르는 이유이다.”
학생들은 실제로 “모든 것이 상대적이다” 라고 믿는 것은 아님에도, 그들은 마치 그런 듯이 행동한다.
“컴퓨터 고장이 있다면, 그들은 신에 의해 고쳐지도록 기도하거나, 컴퓨터를 갖다 버리지 않는 대신 기술 지원을 요청한다. 그들은 전문가들에게 문의한다.”
그런데 이 전문가들은 Schudson에 의하면, 무엇이 실제인지를 찾아 낼 수 있는 자들이란 것이다.
“실제가 강력하게 문을 두드릴 때,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는 미숙한 생각은 떨쳐질 수 있다.”
“상대주의자나 모더니스트 또는 포스트모더니스트, 좌파 든 우파 든 모두 이 전문가를 찾을 것이다.”
국가와 ‘전문가 집단’의 댄스
Schudson이 제안하는 것처럼 전문가들이 진실과 좋은 저널리즘의 소스라는 생각은 다음 두 가지 이유로 오류가 있다고 본다. 첫째, 그는 이것이 저널리즘의 기본적인 목적인 권력에 있는 자들을 견제하고 감시하는 것이란 역할과 대치하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저널리즘의 목적은 단지 권력을 위한 대변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둘째, Schudson은 순진하게도 전문가들과 정치 권력과의 밀접한 관계를 간과하고 있다. 아마도 그는 단순히 이것을 문제로 보지 못하는 것일 수 있다.
무엇보다. 공무원과 전문가들이 이타적으로 공공의 이익을 위한다고 보는 견해를 갖고 있다. Public Choice Theory (그리고 상식)는 이와 같은 견해는 역시 순진한 것으로 생각한다. 한 개인이 정부를 위해서 일하거나 정부를 대표하는 일을 한다고 해서 그 개인의 사적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관련영상: https://youtu.be/qecuBjHH_2c
Schudson이 말한 것처럼, 저널리스트가 전문가들이 복잡한 이 세상을 설명하는 것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는 것은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전문가들”을 진실의 궁극적인 소스로 보는 것은 기이한 철학이다. 이것은 국가와 전문가들이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함께 이인용 자전거를 타는 상황을 간과하게 한다.
화려한 언어로, 경제학자 Murray Rothbard는 국가와 “전문가 집단”인 – 전문가들, 교수들, 저널리스트들 등 –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 선정적인 댄스가 어떻게 동작하는 지 설명한다.
“그 규칙은 착취적이고 기생충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국가는 군중들이 국가의 규칙을 수용하고 축하하도록 속이기 위한 ‘전문가 집단’의 연합을 돈으로 사야한다.” Rothbard는 1976 에세이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들의 계속되는 사과들과 속임수들의 대가로 이 ‘전문가 집단’은 권력자, 상류층내에 주니어 파트너로서의 지위를 차지 한다. 그리고 국가 기관이 기만된 대중에게서 빼앗은 전리품들을 상으로 받는다.
저널리스트들이 “전문가들이 말하기를 이라고 말할 때, 이것은 프로파간다임을 드러내는 사인이 된다.”

이런 저널리스트들은 전문가들의 전문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매우 소수만이 파우치 박사의 유행병학자로서의 전문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파우치 박사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불평은 메디컬 어드바이저로써의 그의 역할을 훨씬 벗어나 행동해 왔다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저널리스트와 시민들은 전문가들의 권력과 영향력과의 밀접성을 인식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전문가들 역시 정치인들처럼 그들이 하는 일 때문에 그들의 사적 이익을 포기하지 않는 다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전문가들의 데이터와 코멘트들은 면밀히 조사되어야 하고, 해부 되어야 하고, 논의되어야 하며, 복음처럼 강제적인 정책의 prima facie evidence (반증이 필요 없는 채택된 증거)로 인식되어서는 안 된다. (경제학자 Ludwig von Mises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ought in science”는 즉, “과학에 따르면 무언가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은 틀렸다. 과학은 단지 우리에게 그것은 무엇인가를 알려줄 뿐이다.)
Ekstra Bladet, 이 덴마크의 한 신문사는 펜데믹을 통해 이 중요한 수업들을 배운 것으로 보인다.
자, 우리 모두 전 세계에서 이와 같은 뉴스들이 터져 나오기를 희망하자!
Jon Miltimore – FEE.org의 에디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