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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영양, 경상북도 영양에서 출생하였다. 1895년 남편 김영주가 의병으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하여 유복자를 길렀다. 1919년 3·1운동 때 중국 둥베이 지방으로 건너가 서로군정서에서 활약하는 한편, 12곳에 교회를 건립하고 10개의 여성교육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과 여성계몽에 힘썼다.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에 의해 죽임을 당하면서 전국에서 의병 활동이 일어났다. 남자현의 남편 김영주도 이 을미 의병에 참여했다. 남편뿐 아니라 아버지의 불매서원에서 공부하던 모든 유생들이 함께 의병 활동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남편 김영주는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다. 그때 남자현의 나이는 24세, 뱃속에는 아기가 있었다.
1919년 3월 1일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남자현도 서울까지 올라와 함께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평화 시위만으로는 힘이 부족하다고 판단하고는 만주 땅으로 건너가 독립 무장 투쟁가로서의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그때 남자현의 나이 47세였다.
1920년 경신참변으로 인해 만주 일대의 민심은 피폐해졌다. 항일의 의지는 높았으나 항일의 방법에 대해서는 서로 의견이 갈렸다. 1920년 8월 29일, 국권을 빼앗긴날을 기억하기 위해 1,000여 명의 독립군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러나 서로의 음성만 높아지고 마음은 쉽게 모이지 않았다.
남자현은 그 자리에서 자신의 왼쪽 엄지손가락을 잘랐다. 그 피로 남자현은 글을 적어 나가기 시작했다. 누구의 방법이 옳은지, 더 나은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며, 일본에 맞서 싸워 독립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은 모두 같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래서 힘을 모으자고, 한마음 한뜻으로 나아가자고 모두 결의를 다졌다.
하지만 1922년에 다시 우리 민족끼리 피를 흘리는 싸움마저 일어났다. 남자현은 그때 두 번째 손가락을 자른다.
"독립운동계여! 단결합시다. 우리는 일본과 싸우러 왔지 동족과 싸우러 온게 아닙니다. 피 한 방울이라도 적을 위해 써야 하는 이때, 같은 민족을 해치는 데 쓰다니 너무 아깝지 않소?"
독립군들이 놀라 달려와 남자현의 손을 붙잡았다. "내 손가락을 아끼려고 하지 말고, 우리 동포를 아끼시고, 이 나라의 내일이나 아끼시오."
독립군들은 그제야 싸움을 멈추었다. 사람들은 모두들 남자현의 마음을, 그 의지를 잊지 않으려고 나무로 작은 손가락비를 세웠다.
오늘날의 UN인 국제 연맹이 만주에 현장조사단을 파견한다는 소식이 퍼진 때였다. 우리 독립군들은 국제 연명에 우리의 독립 의지를 알릴 좋은 기회라 여겼다. 우리 조선 역시 만주국처럼 일제에 의해 강제로 병합되었다는 걸 국제 사회에 알리고자 했다.
일제는 모든 언론을 막고, 조사단이 머무르는 하얼빈의 호텔을 삼엄하게 통제하였다. 조사단에게 접촉하려는 사람은 바로 그 자리에서 죽였다.
1932년 예순의 나이에 남자현은 자신의 세 번째 손가락을 자릅니다. 잘린 손가락에서 뚝뚝 흐르는 붉은 피로 다섯 자의 글을 씁니다.
대한독립원 '願立獨韓大'
대한은 독립을 원한다는 뜻이다.
남자현은 잘린 자신의 무명지와 붉은 혈서, 그리고 우리 여성의 독립운동 현황을 적은 보고서를 손수건에 싼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조사단이 머무는 호텔로 드나드는 중국인 인력거꾼에세 부탁을 한다. 손수건을 꼭 전해달라고.
인력거 바닥에 손수건을 매단 채 호텔로 들어갔으나, 불행히도 일본 경찰에게 수색을 당해 손수건은 전해지지 못한다. 이 손수건이 국제 연맹에 전해졌다면 역사는 바뀌었을까?
1933년 만주 괴뢰정부 건국일(3월 1일)에 이규동등과 함께 일본장교 무토 노부요시를 살해하려고 폭탄과 무기를 휴대하고 가다가 체포되었다. 옥중에서도 단식으로 항쟁하다가 병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하얼빈에서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경신참변 (1920)
만주로 건너온 독립군들은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등 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얻었다. 그러자 일본은 보복을 위해 만주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남자들은 무자비하게 때려죽이고 여자와 노인, 아이들은 교회나 학교 안에 넣고 불을 질렀다. 이 일을 경신참변 혹은 간도 참변이라 한다.
자유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요새 절감합니다. 남자현은 19세에 결혼을 하고 24살에 과부가 되어 유복자를 기르며 독립운동을 했던 독립운동의 대모이기도 합니다. 그녀의 손가락 세개는 목숨보다도 값진 희생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이 자유를 위해 현재는 우리가 그녀의 정신을 이어가야 한다는 간절함이 매일 드는 요즘입니다!
[나는 여성독립운동가입니다]
[두산백과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