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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 8. 12 본관 경주 원산출생, 고향인 두남리는 원산에서 10리쯤 떨어진 풍광이 아름다운 전형적인 농촌이었다. 이곳은 일찍이 기독교 전래와 더불어 교회, 학교를 운영하는 등 서구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조부와 부친도 사립학교를 설립하거나 교육 사업에 종사하였다. 루씨고등여학교를 나와 서울여자신학교에 재학 중이던 1931년 YWCA 농촌사업부에서 경기도 수원군 반월면 샘골(현 아산시 상록구 본오동)에 파견되어 농촌교육을 시작하였다.
구한말 최용신의 조부는 사재를 들여 고향에 학교를 세웠다. 그래서일까 용신은 어릴 때부터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협성 신학교에 다닐 때 황에스더 선생님이 농촌으로 가 선생님이 되어 보라고 하셨다. 우리 민족이 살길은 오로지 농촌에 있다고, 농민들이 깨어나야 우리 민족이 깨어난다고 용신은 그 말씀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작은 예배당이 있는 안산 샘골마을에 선생님으로 갔다.
부푼 꿈을 안고 샘골로 왔지만, 막상 와 보니 농촌 마을의 실상은 너무나도 처참했다. 한 해 농사를 지으면 빗자루와 검불만 남기고 죄다 일제나 지주가 가져갔다. 농촌 가정에는 아무런 희망도, 꿈도 없었다. 용신은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아이들을 예배당으로 보내만 주면 공부를 가르쳐 주겠다고 했지만, 사람들은 콧방귀도 안 뀌었다. 이때껏 그깟 공부 안 해도 자식들 시집 장가 잘만 보내고, 잘살아 왔으니 간섭하지 말라고 했다. 여자애들은 공부시켜 놓으면 연애나 하다가 인생을 망치고, 남자애들은 도시로 도망가 버리니 절대 안된다고 하였다. 빨래터나 마을 사랑방에서는 얼기설기 곰보 처녀가 아무것도 모르면서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닌다고 쑥덕대기도 했다.
도시 학생들이 와서 농촌 계몽이다 뭐다 하면서 바람만 잔뜩 집어넣고 나중에는 나 몰라라 하면서 그냥 가 버려서 그게 너무 싫어서 반대했던 것이다. 용신은 이곳 샘골에 뼈를 묻겠다고 했다.
처음에는 한두 명, 서너 명 예배당으로 오기 시작했는데, 점점 늘어나서 110여 명이나 되었다. 오전반, 오후반, 야간반으로 나누어도 좁은 예배당 안으로 들어올 수가 없었다. 다음에 오라고 타일러도 아이들은 예배당 주변을 기웃거리면서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아이들은 정말 배우고 싶어했다.
용신은 좁은 예배당이 아니라 학교를 지어야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비용을 마련하는 것이 문제였다. 마을의 부잣집을 찾아가 좀 도와달라고 했더니,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냐면서 쫓아냈다. 그래서 아이들과 함께 멋진 학예회를 준비했다. 둥근 보름달이 뜨자 마을 어른들은 학예회를 보러 왔다. 춤추고 노래하고 학교를 세우게 도와달라는 멋진 연설도 했다. 마을 사람들은 이들의 모습을 보고 감격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도시 애들만, 양반집 애들만 똘똘하고 말 잘하고 노래 잘하는 줄 알았는데, 우리네도 교육을 받으니까 똑똑해질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이다.
바로 그 자리에서 학교 건축을 위한 모임이 만들어졌다. 부잣집 어르신도 그제야 마음을 돌리고 용신의 일에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었다. 온 마을 사람들이 나무를 나르고, 흙을 날라서 뚝딱뚝딱 학교가 만들어졌다. 한 달 만에 기초 공사를 마치고 머릿돌을 세웠다. 다섯 달 만에 세상에서 가장 멋진 학교가 만들어졌다. 그들은 이 일을 통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학교가 만들어지자 일본 순사가 수시로 들락거렸다. 무얼 가르치냐고 꼬치꼬치 캐물었다. 당시 학교에서는 일본어만 써야 했는데, 용신은 원래 우리나라의 말은 조선어이고 한글이 진짜 국어라고 가르쳤다. 하지만 일본 순사에게 들통 나면 감옥에 가는 건 물론이고, 학교 문도 닫아야 했다. 그래서 한 사람씩 밖에서 망을 보면서 수업을 했다. 일본 순사가 오면 냉큼 일본어로 된 책을 꺼내고, 진짜 우리 국어는 숨겼다. 그들은 똘똘 뭉쳐서 배움을 이어갔다.
용신은 아이들에게 더 많은 걸 가르쳐 주고 싶어서 좀 더 많을 걸 배우기 위해 일본에 다녀왔다. 돌아오던 날, 고갯마루에서 아이들이 뛰어왔다. 용신이 일본에 간 동안 매일 고갯마루에서 '우리 선생이 언제 오시나?' 하고 기다렸다는 것이다. 차마 그런 아이들을 두고 떠날 수 없었다. 하지만 용신은 아이들 곁을 지켜 주지 못했다. 과로로 쓰러져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여성단체협의회에서는 1964년 용신봉사상(容信奉仕賞)을 제정하여 매년 시상해 오고 있다.
[나는 여성독립운동가입니다]
[두산백과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