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마리아는 1862년에 황해도 해주군에서 배천 조씨 선과 원주 원씨의 3남2녀 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조마리아의 가문은 조선 선조 대 만경현령을 지낸 조복립, 효종 대 한성판윤에 오른 조관, 현종 대 통정대부의 품계를 받은 조응건등을 배출한 명문가였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문과 급제가 점차 어려워지자 무과를 통해 관직 진출을 모색하였다.
조마리아는 황해도 해주군 광석동에 사는 동갑내기 안태훈(1862~1905)과 혼인하였다. 안태훈의 본관은 순흥으로 안기옥 이래 무과급제자를 다수 배출하여 명망 있는 가문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무반가문이라는 공통점은 두 가문의 결속을 가능케 한 중요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조마리아는 안태훈과의 사이에 안중근(1879~1910), 안성녀(1881~1954), 안정근(1994~1949), 안공근(1889~1939)등 3남1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이들은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구한말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조마리아 가족들은 관직을 버리고 황해도 신천군 청계등, 산골 마을로 이사를 왔다. 그곳에서 자식들을 기르고 혼인도 시키고 천주교를 받아들여 신앙심도 키웠다. 그러나 나라는 더욱 위태로워져만 갔고남편도 세상을 떠났다. 그때 항일 운동의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중국에 있던 큰 아들 중근이 급히 귀국했다.
"어머님, 나라를 살릴 길은 인재를 양성하는 길뿐입니다. 그래서 청계동의 가산을 팔아 학교를 세웠으면 합니다."
"생각해 둔 바가 있느냐?"
"천주교 본당의 학교를 인수하여 우리 민족의 인재를 키우는 학교로 운영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려무나"
그래서 가족들은 정들었던 청계동을 떠나 진남포로 거주를 옮기에 되었다. 진남포로 이사를 할 때, 집안 가족들만 해도 80여명이 넘는 대가족이었다. 본래 살림이 넉넉했지만, 그 재산들을 모두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 사업에 쏟아부었다. 집안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내 한 몸 편히 살자고 하지 않았다.
그즈음 일본은 갖가지 핑계를 대며 손해 배상을 청구하고, 여러가지 사업을 벌이도록 우리나라에 빌려 준 돈이 무려 1,300만 원(현재 가치로 약 3,900억 원)에 이르게 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은 빚 독촉을 하면서 우리 국 민들을 경제적으로 압박하였다. 빚을 갚지 못하면 결국 일본의 종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온 나라에 가득하였다.
그러한 때에 대구에서 국채 보상 운동이 일어났다. 온 국민이 담배를 석 달 동안 끊어 그 담뱃값 60전을 모아 1,300만 원을 갚아 버리자는 것이었다. 국민의 힘으로 빚을 갚아 국권을 회복하자는 운동이었다.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다
국채 보상 운동은 양반이나 상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참여하기 시작했다. 나랏일은 남자들의 몫이라고 생각했던 여인네들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나랏일은 양반들만 하는 거라 생각했던 민중들도 깨어났다. 담뱃값 이라는 적은 돈이 국권 회복에 큰 힘으로 보태질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조마리아와 아들 중근이도 국채 보상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중근은 여러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연설을 하며 국채 보상 운동을 알렸다. 그러자 일본 순사가 와서 비웃었다.
"조선 사람들은 하등한 인간인데, 너희들이 무슨 일을 할 수 있다고 그러는가?"
"빚을 준 사람은 빚만 받으면 되지, 왜 그리 욕을 하시는가?"
그러자 일본 순사가 욕을 하면서 중근에게 달려들었다. 나라의 빚을 갚겠다는 이들의 의지는 강했다. 중근은 국채 보상 기성회 관서지부를 세워 국채 보상 운동을 이끌어 나갔고, 조마리아는 '삼화황 패물 폐지 부인회'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세 명의 며느리도 시집올 때 가져온 패물들을 모두 의연금으로 내어놓았다.
조마리아는 삼화황 패물 폐지 부인회의 여인들은 여자들의 패물로 3,000만 원을 만들어 나라의 빚을 갚음은 물론이고, 학교와 은행을 세워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회원 증 패물을 차고 있다가 들통이 나면 10원의 벌금까지 받아 보상금에 보태겠다고 규칙도 만들었다.
그러나 국채 보상 운동이 전국으로 퍼져 나가자 일본의 탄압이 심해졌다. 일본은 고종황제를 물러나게 하고 군대를 해산시켰다. 또 국채 보상 운동을 주도하고 있던 <대한매일신보>의 양기탁 선생이 돈을 빼돌리고 있다는 거짓 누명을 씌워서 감옥에 가두었다. 나라를 위해 담뱃값과 패물값으로 모은 돈을 일부의 사람들이 빼돌린다고 하는 일본의 거짓 선전에 사람들은 속고 말았다. 물론 나중에 양기탁 선생은 무죄로 풀려나긴 했지만, 그 때는 이미 국채 보상 운동이 사그라지고 난 이후였다. 하지만 이 때 모은 돈이 이후 대학을 설립하는 기초가 된 것이 그나마 작은 위안이 되었다.
일본의 압박과 감시가 더욱 심해지자 중근은 국내에서는 더 이상 나라를 구할 활동을 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아들아, 집안일은 생각하지 말고 최후까지 남자답게 싸우거라."
중근 뿐 아니라 나라의 많은 아들들이 나라를 구하겠다는 마음으로 해외로 망명하기 시작했다. 여인네들은 국내에 홀로 남아 집안을 책임져야만 했다. 조마리아는 아들이 떠난 집안에서 자신처럼 남은 여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였다.
1909년 10월이 끝나갈 무렵, 아침에 신문을 보던 조마리아는 너무나도 놀랐다.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킨 이토 히로부미가 남만주 철도를 타고 하얼빈에 도착했다. 이때 이토 히로부미는 광활한 만주 벌판을 보면서 곧 그 땅을 삼킬 생각으로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 역에 내렸을 때, 세 발의 탄환이 날아들었다. 안중근이 쏜 것이었다. 신문을 읽고 그녀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조마리아는 정근, 공근 두 아들을 여순 형무소로 보내 형을 만나게 보게 했다. 중근은 처음에 두 동생들을 결코 보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 말을 듣자 아들이 얼마나 남은 식구들을 걱정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아들에게 제 십자가를 건네주라고 했다.
"맹세코 천주교인으로서의 자격과 신자의 도리에 추대를 보이지 않고 최후에 이를 터이니, 어머니께서는 안심하시라고 전해다오."
아들은 자신의 뜻을 전하려면 일본인 변호사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변호사가 필요하니 주선해 달라고 부탁했다. 일본에서는 이 일을 한 개인이 원한 때문에 일본인을 죽인 일로 처리하려고 하였다. 중근은 의군 참모중장이다. 또한 우리나라는 일본과 독립 전쟁 중이었다. 그런데도 왜 일본의 법으로 재판을 받아야 하는가? 아들의 주장대로 만국 공법에 의해 재판 받는 일이 당연했다. 먼저 우리나라 변호사를 구하는 일이 시급했다.
조마리아는 직접 평양으로 가 안병찬 변호사를 만났다. 변호사는 기꺼이 변호를 해 주려고 했으나, 일본 법원에서는 받아 주질 않았다. 오직 일본 변호사만 쓸 수 있다고 하였다. 일본이 끝내 중근을 죽이려 한다는 걸 알았다.
중근은 끝내 사형을 선고 받았다. 일본이 원하는 대로 재판이 진행되었다. 아들은 재판 결과에 불복하여 재심사해달라 상고한다고 하였다. 상고를 해도 결과는 절대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리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중근이 목숨을 구걸한다 하겠지 어찌 그런 소리를 내 아들이 듣게 한단 말인가?
조마리아는 아들 안중근을 찾아갔다. "아들아 네가 만일 늙은 이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세상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분노를 짊어지고 있는 것이 다. 네가 상고를 한다면 혹여나 네가 목숨을 구걸한다고 여겨질까 두렵구나. 네가 나라를 위해 이리 이르렀으니, 오로지 천주님께 기도할 뿐이다." 그제야 아들은 어머니에게 살포시 웃으며, 눈을 맞추더니 늙은 어미의 얼굴을 만졌다.
그녀는 그 손을 지그시 누르며 두 눈을 꼭 감고 기도하였다.
집으로 돌아와 새하얀 명주 천을 꺼내어 아들을 위해, 천주님께 나아갈 때 입고 갈 수의나마 지어주고 싶었다. 아들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이 하나라도 있다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한 땀 한 땀 바늘이 움직일 때마다 결심했다. 얼마 남자 않은 한 평생, 내 아들의 뜻을 더럽히지 않고 살겠노라고
식민 체제 아래서 안중근 의사 유족에 대한 일본의 감시는 더욱 심해졌다. 가족들의 목숨마저 위태로워지자 그들은 연해주로 망명하였다.
조마리아의 집에는 많은 항일 운동가들이 찾아와 쉬었다 갔다. 조마리아는 독립운동가들의 찾아오면 언제나 따뜻하고 편안하게 대접해 주었다. 그러나 1차 대전 후 일본의 세력이 더욱 뻗쳐오며 위협을 하자 조마리아는 다시 러시아로 옮겨갔다. 그곳에서 다시 땅을 개간하여 상당한 부를 이루었다.
우리나라 교포들은 조마리아를 대단히 존경하였다. 갈등이 생길때마다 언제나 타이르고 깨우쳐서 교포들 사이에서 생기는 문제들을 해결해 주었다고 한다.
당시 러시아 연해주 한인신문 < 대동공보> 의 주필 이강 선생은 조마리아를 두고 "그렇게 위대한 여걸은 다시 보지 못했다. 과연 범이 범을 낳았다."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조마리아와 안중근 의사 유족들은 상해에 있는 독립지사들에게도 큰 힘이 되어 주었다. 독립지사들을 먹여 주고, 재워 주고, 아프면 간호해 주기도 하면서 물심양면으로 뒷바라지를 해 주었다. 독립운동에 열기를 더해 주고 희망을 주고, 때때로 문제를 해결해 주기도 했다. 조마리아와 함께 상해 하늘 아래에서 같은 공기를 마신다는 것만으로도 독립지사들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나는 여성독립운동가입니다]
[두산백과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