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춘은 1914년 9월 8일 전라남도 나주군 다시면 복암리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정미소를 운동하는 부친의 지극한 사랑을 받아 어렸을 때부터 활달하고 진취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 뒤, 동교생들과 함께 소녀회를 조직하고 소녀회의 멤버로서 활동하며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그러던 1929년 10월 30일, 당시 광주여고보 3학년이던 이광춘은 친구 박기옥과 함께 통학 열차에 탑승하여 이동하다가 나주역에서 출입구를 나가려 했다. 그때 일본인 광주중학교의 4학년 학생 후쿠다 슈죠, 스메요시 가쓰오, 다나카 등이 접근해오더니 이광춘과 박기옥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했다.
이때 역에서 같이 걸어나오고 있던 박기옥의 사촌 남동생이자 광주고등보통학교 2학년생 박준채가 격분하여 사과를 요구했다. 그러자 후쿠다 슈조 학생이 "뭐냐 조센징 주제에"라며 무시했고, 격분한 박준채는 그의 따귀를 갈겼다. 이로 인해 나주역내에서 한국인 학생들과 일본인 학생들간의 패싸움이 벌어졌다.
그러나 교육 당국이 한국인 학생들에게만 징계를 주는 등 부당한 처분을 하자, 이에 격분한 한국인 학생들은 1929년 11월 3일 광주역으로 모여들어 정당한 요구를 했다. 억울하게 구속된 학생들을 석방하라, 학교 안으로 일본 경찰들이 들어오지 말라, 식민지 노예 교육을 시키지 말라, 학생회 자치권을 달라 등 학교생활에 관한 것이었다. 광주고등보통학교와 광주농업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들은 학생들을 마구 잡아가기만 하였다. 이때 이광춘은 치마에 돌멩이를 싸들고 시위에 가담했다. 그러다 일본 경찰에 붙잡혀 가혹한 고문을 당했다. 그러다가 그날 오후 광주고보 최쌍현 학생이 일본인 중학생이 휘두른 칼에 얼굴을 크게 다쳤다. 이 일을 계기로 광주고보, 광주자연과학고등학교, 광주여고보, 광주사범학교 등 광주의 모든 학생들이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내로 쏟아져 나왔다.
일본은 서둘러 모든 학교에 일주일간 휴교령을 내렸다. 다시 학교로 등교하기 시작한 11월12일 광주 학생들의 2차 시위가 있었다. 많은 광주 학생들이 체포되었다는 소문을 들은 목포, 나주 지역의 학생들도 함께했다. 크게 당황한 일본은 학생 운동이 언론에 보도되지 않도록 보도 금지령을 내리고, 또 뒤로는 학생들을 살살 달래면서 사태를 수습하려 고 하였다. 그러나 학생들은 속지 않았고 광주의 신간회, 사회 단체, 청년 단체 등이 혼연 일체가 되어 학생 운동을 돕기 시작했다.
일본은 학교를 폐쇄하거나 일찍 겨울 방학을 실시하여 학생들을 통제하고 감시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도리어 방학을 이용하여 고향에 내려가거나 여행을 하면서 학생 운동에 관한 소식을 전해 전국적인 운동으로 이끌어 나갔다.
1930년 1월 8일, 학교는 다시 개학을 했다. 일제 강점기 당시에는 1년 3학기제였다. 서둘러 방학을 하느라 기말고사를 치르지 못한 학교에서는 개학하자마자 기말고사를 치렀다.
이날, 잠시 일본 경찰의 손에서 풀려난 이광춘은 시험 시간에 교실 안 교탁 위로 올라가 외쳤다.
"지금 우리 동무들이 감옥에 있는데, 너희들은 시험을 보겠다는 것이냐?"
이광춘이 밖으로 나가자 학생들이 모두 뒤따라 교실 밖으로 뛰어 나갔다. 삽시간에 전교생들이 뭉쳐서 시험을 거부하며 밖으로 나갔다. 이 일로 인해 이광춘은 퇴학 처분을 받고 일제에 의해 다시 감옥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광주 학생을 본받자. 광주 학생을 따라가자."
전국적으로 '백지 시험 동맹'이 번져 나갔다. 광주 학생 독립 운동은 전국을 넘어 해외까지 확산되었는데, 일본이나 중국에서도 같은 마음이었다. 이후 5개월간 학생 운동은 더욱 확대되었고, 우리 민족의 해방 운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해방 이후, 광주 학생 독립 운동이 일어났던 11월 3일을 기억하기 위해 이 날을 '학생의 날'로 제정하였다. 오늘날에는 '학생 독립운동 기념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후 그녀는 학교에 더이상 다니지 않고 평범한 주부로서 살아가면서 5남3녀를 낳았고, 1954년 전남여자고등학교로부터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1996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을 수여받았고, 2010년 4월 12일 나주시 남외동 남외2길 4번지에서 사망했다. 향년 96세. 그녀의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나는 여성독립운동가입니다]
[나무위키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