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민의힘 대선 예비후보인 최재형 전 감사원장이 4일 오후 경기도 파주 미라클스튜디오에서 대선 출마선언을 했다.ⓒ 국회사진취재단
"저는 우리나라 대통령 중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이, 물론 공과가 있지만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기초를 놓았다는 점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최재형 국민의힘 대선 예비후보(전 감사원장)가 4일 오후 대선 출마를 공식선언하면서 보수 본색을 드러냈다.
이날 대선출마선언식 및 온라인기자간담회에서 '역대 대통령 중 헌법 가치 측면에서 가장 높게 평가하는 대통령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그는 주저 없이 이 전 대통령을 꼽았다.
부동산 문제 해법으로는 등록임대사업자 관련 규제 완화를 강조하면서, 중대재해법에 대해선 기업의 활동을 위축하는 법이라며 부정적인 입장을 드러냈다.
최 예비후보는 "다주택자도 매물을 내놓을 수 있도록 양도세·보유세를 과감하게 완화해 임대료를 안정화하겠다며 "등록임대사업자가 우리나라 전체 임대 중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에 대한 규제를 완화해 임대 물량을 충분히 공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단 1호만 임대주택으로 등록해도 공시가격 6억원 이하면 양도세 중과 배제, 종부세 합산 배제 등 세제 '특혜'를 받는 임대사업자에 대해 규제를 더 풀겠다고 한 것이다.
"중대재해법, 기업 활동 과도하게 위축"
▲ 국민의힘 대선 예비후보인 최재형 전 감사원장이 4일 오후 경기도 파주 미라클스튜디오에서 대선 출마선언을 하기 전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산업현장에서 최근 잇따라 발생한 사망사고를 계기로 마련된 중대재해법에 대해선 "기업에 대한 규제는 '(이것이) 과연 균형 있는 규제인가, 기업 활동과 우리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측면에서 봐야한다"며 "중대재해법은 너무 과도하게 기업의 활동을 위축하고 책임의 범위를 너무 확장하는 법률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또 최 예비후보는 이재명 경기지사의 기본소득 정책을 두고 "현실적이지 않다"고 맹비판했다. 그는 "모든 국민에게 똑같은 돈을 나눠주는 것은 불합리하다. 정말 어려운 분들에게 지원이 집중될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물론 앞으로 산업이 고도화했을 때는 기본소득이 우리 사회에서 시행될 수 있지만 아직은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대중 외교에 대해선 두루뭉술한 답변을 내놨다. 그는 "중국과의 외교는 우리 외교 중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다. (중국과의) 경제 교역량이 많고, 역사적으로도 중국과 우리는 많은 관계를 맺어왔다"며 "외교의 가장 첫번째는 원칙 있는 외교, 당당한 외교다. 중국에 굴종적인 현 정부의 외교에 많은 국민이 분노하고 있다. 경제적인 이익도 중요하지만, 당당한 외교를 펼치면서 자유민주주의와 법치, 인류 평화 가치를 공동으로 하는 나라와의 관계를 더 공고히 하면서 중국과의 외교를 풀어야 한다"고 했다.
'왜 윤석열 예비후보가 아닌 본인이 대통령이 돼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나오자 그는 멋쩍은 듯 웃음을 보였다. 최 예비후보는 "우리나라는 거의 내전적 분열, 정치적 분열 상태에 있다고 본다. 이런 분열에 관련한 여러분들이 아직도 정치계에 남아있다. 저는 이런 여러 과거 일에서 자유로운 사람이다. 정치적 부채가 없는 사람"이라며 "다른 어떤 사람보다 법치 회복과 국정의 여러 문제를 해결 할 적임자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상법, 반도체 질문엔 "정치 시작 얼마 안 돼서..."
▲ 국민의힘 대선 예비후보인 최재형 전 감사원장이 4일 오후 경기도 파주 미라클스튜디오에서 대선 출마선언을 했다.
세부 질문에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앞서 그가 '최저임금 인상은 범죄와 다름없다'고 한 데 대해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가 '경제 철학과 내공이 부족하다'고 지적한 것과 관련해 "당연한 말씀이다. 제가 김 전 부총리만큼 경제를 알겠는가. 그 말의 취지는 얼마든지 받아들인다. 더 좋은 대안을 내놓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소액주주 권한을 강화하는 내용의 상법 개정안 등에 대한 질문에도 "아직 공부가 부족하다. 더 열심히 공부해 문제가 무엇인지 여러분께 말씀드리겠다"고 짧게 답했다. '중국이 반도체 산업을 바짝 쫓아오고 있는데 어떻게 지원할 것인가'라는 질문에도 역시 "정치를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은 점을 고려해달라. 앞으로 열심히 뛰어 좋은 정책을 내놓겠다"고 했다.
급기야 '준비가 안 된 상황에서 대선 출마를 선언했나'라는 질문까지 나오자 최 예비후보는 "국정 전반, 정책에 대한 준비가 돼 있지 않다는 점을 제가 인정하고 앞으로 더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출처:"이승만, 가장 중요한 대통령" 보수본색 드러낸 최재형 - 오마이뉴스 (ohmynews.com)
아니, 기자양반 이 나라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을 존경하면 안되는겨???
이승만 대통령 존경하면 보수 본색을 드러내는 일이 되는겨???
기사를 왜 이따구로 편향되게 쓰는거냐 기자양반???
이승만 대통령이 왜? 어때서...??? 기자양반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자세히 알기나 하고 이런식의 기사를 쓰는건감??
이참에 이승만 대통령이 어떤 분이신지 공부좀 해보랑께~~~~~!!!!😡😡
건국대통령 이승만을 아십니까??(건국 대통령 "이 승만"을 아십니까?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건국대통령 이승만은 4·19가 일어나자 학생들의 정의감을 크게 칭찬한 뒤 스스로 권좌에서 물러났다. 그 후 한 달여 사저 이화장에서 지낸 그는 1960년 5월 29일, 하와이로 떠난다. 이승만으로서는 부인 프란체스카와 함께 ‘잠깐 다니러 간 여행’이었으나, 언론에서는 이를 ‘망명’이라 못 박았다.
이승만은 한시도 귀향의 꿈을 버리지 않고 타의에 의한 하와이 생활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싸늘한 주검이 되어 그리도 돌아오고 싶어 하던 조국 땅에 내렸다. 그리고 수많은 국민들의 애도 속에 동작동 국립묘지에 잠들었다. 이 책은 그가 이화장을 떠나 하와이로 간 뒤, 자신이 일군 대한민국을 그리워하며 보낸 5년 2개월 동안의 ‘눈물의 기록’이다. 정말이지 우리의 건국 대통령은 너무나 허망하고 쓸쓸하게 머나먼 태평양의 섬에서 눈을 감았다.
1960년 5월 24일, 하와이 동지회장 최백렬(미국명 윌버 최) 씨로부터 대통령에게 꼭 필요한 휴양을 하실 수 있도록 체류비와 여비 일체를 부담해 드릴 테니 하와이를 다녀가시도록 하라는 내용의 초청 전보를 받았다. 그리하여 우리는 2주일 내지 한 달 정도 하와이를 다녀올 수 있는 짐을 챙겼다. 5월 29일, 상오 7시에 우리는 이화장을 출발했는데 떠나기에 앞서 대통령은 마당에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늦어도 한 달 후에 돌아올 테니 집을 봐 줘”하고 부탁했다. 차를 타고 이화장 문을 나서니 이미 신문사 차가 와 있었다. 김포지역에 들어서자마자 호외를 뿌리기 시작했다. ‘이 박사 망명’호외였다. 김포공항엔 허정 내각수반과 이수영 외무차관 등이 나와 있었다.
당시 기내에선 세관원들이 들어와 소지품 검사를 했다. 그때 짐이라곤 이 박사 옷과 부인 옷이 들어 있는 트렁크 2개, 샌드위치와 마실 것, 평소에 쓰던 타이프라이터 한 대 등 모두 가방 네 개였다. 조종사들이 식사를 하느라 한 시간 가량 시간이 있었다. 기자들이 몰려와 회견요청을 했으나 이 박사는 “내가 아무 말 않고 조용히 떠나야 한다”고 했으며 부인은 “아이 러브코리아”하며 우셨다. 이승만이 귀국을 위해 노력했던 눈물겨운 모습은 망명생활 중 곳곳에 배어 있다. 5달러하는 이발비를 아껴 여비를 모으기도 했다. 그 바람에 한동안 머리가 보기 싫을 정도로 길어서 프란체스카 여사가 손수 이발을 해드려야 했다.
이승만을 찾아와 위로하고 가는 미국의 요인들도 많았다. 태평양 주둔 미군 총사령관인 화이트(Issac D. White) 대장이 그랬고, 주한 유엔군사령관을 지내고 당시에는 합참의장으로 있던 램니처(Lyman Lemnitzer) 장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또한 국방장관을 지낸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Strange McNamara)와 맥아더 장군, 그리고 밴 플리트 장군도 이승만을 만나러 일부러 하와이에 들렀던 인물들이다. 이들은 모두가 6?25전쟁 중 이승만을 만난 뒤 평생토록 존경해마지 않았던 이들이었다.
이승만의 타계와 국립묘지 안장
“7월19일 0시35분, 임종하셨습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독립운동으로 건국을 성취해냈고, 전쟁으로부터 민족을 구원해내며 전 생애를 아낌없이 불살랐던 위대한 한국인 이승만, 그는 이역만리 떨어진 땅 하와이 섬에서 고국을 그리다 너무나도 쓸쓸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승만의 오랜 지기 보스윅(W. Borthwick)이 교회 입구에서부터 사람들을 헤치며 성큼성큼 걸어 들어와 관 앞에 섰다. 그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한 표정이 되어 이승만의 얼굴에 덮인 베일을 걷어내더니 울부짖었다.
“내가 자네를 안다네! 내가 자네를 알아! (I know you! I know you!)
자네가 얼마나 조국을 사랑하고 있는지,
자네가 얼마나 억울한지를 내가 잘 안다네!
친구여!
그것 때문에 자네가 얼마나 고생을 해왔는지,
바로 그 애국심 때문에 자네가 그토록 비난받고 살아온 것을
내가 잘 안다네!
내 소중한 친구여...”
공항을 향해 출발한 시간이 9시 30분. 히캄(Hickam Air Force Base, Hawaii) 공군기지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10시 30분. 히캄 공군기지에서는 미 의장대가 나와서 사열하는 가운데 6명의 육해공군 의장대가 조포를 발사하며 영결식을 진행했다. 그를 존경하던 미 장군들의 추도사와 함께 한 의장대원의 진혼 나팔소리가 열대의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이윽고 유해가 의장대원들에 의해 C-118 군 특별기에 실리자 뒤늦게 따라왔던 밴 플리트 장군도 존경하던 영웅과의 마지막을 함께 하기 위해 동행을 희망하여 모두 16명이 비행기에 탑승했다. 1965년 7월 21일 밤 11시 정각. 이승만의 유해를 실은 특별기가 서서히 활주로를 미끄러져가더니 이윽고 밤하늘 속으로 날아올랐다. 영결식을 마친 뒤 태평로를 지나 남대문, 한강교를 거쳐 국립묘지에 도착한 이승만의 유해, 태극기에 싸인 관이 서서히 의장대에 의해 영원한 안식처에 내려졌다. 1965년 7월 27일 오후 5시 45분이었다. 이로써 대한민국 역사의 한 장())도 더불어 막을 내렸다.
정말 나라를 사랑하신 분이셨죠 최재형님도 이런분이길 모델이 있으면 따라가기 쉬워요 주님이 선택하시겠지만요^^
드디어 제대로 된 친미기독교파 후보가 나왔군요.